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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_예술 (冊)

천천히 봐야 자세히 볼 수 있고, 오래 보아야 정이 간다 - 가끔은, 느린 걸음

by Khori(高麗) 2022.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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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30년 전 테제베를 처음 타봤다. 어려서 순천까지 가는 11시간 완행열차를 기억하면 과학의 발전은 정말 편리하다. 700km에 가까운 거리를 4시간 조금 넘어서 데려다주는 기차를 타 본 경험이 훨씬 좋은가? 빠르다는 것을 제외하면 서로 장단점이 있다.

덜컹거리는 기차에 앉아 꼼지락거리는 손주에게 사이다랑 달걀도 까주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기차는 지루하고 엉덩이가 쑤시지만 오래 기억이 남는다. 한밤에 순천을 돌아 여수항이 보이는 모습은 지금도 이국적인 야경으로 남았다. 빠르고 편리한 테제베는 창문을 바라보다 속이 울렁거렸던 기억, 빨리 움직이는 무언가를 타봤다는 기억은 있는데 그 과정이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 추억, 실력은 사용한 시간에 비례한다. 이것들이 새록새록 살아나려면 좀 더 멀리서도 보고, 좀 더 가까이에서도 보는 느림의 미학이 필요하다. 테제베의 추억은 어쩌면 인스턴스처럼 내게 남았다. 이런 생각을 갖고 사는 내게 책 제목이 맘에 들었고, 다른 하나는 어린 시절 골목길의 세상을 사진으로 남긴 김기찬 사진과 같은 기대랄까? 조금 더 감상적이지만 또 다른 맛이 있다.

 

 표지의 분수 속에 있는 사람들처럼 사진과 글을 보며 몇 가지 느끼는 점이 있다. 우리가 찍는 대부분은 사진은 잘 나왔냐? 초점이 잘 맞느냐가 중요하다. 우스운 에피소드로 190의 독일 고객과 160이 안 되는 우리 직원이 같이 사진을 찍었다. 직원이 지나가는 중국인에게 찍어달라고 했더니 우리 직원이 한가운데, 독일 고객은 목 위로는 나오지 않았다. 직원은 짜증을 내고, 나는 왜 그런지 알 것 같아 한참을 웃었다. 

 

 그런데 소개된 사진들을 하나씩 보면 포커스를 어디에 두는지 찾아보는 것이 숨은 그림 같다. 처음엔 책의 재질 때문인가 하는 생각에 아쉬움이 있었다. 파인더를 보는 작가의 관점이 대부분 초점으로 남고, 그 초점은 관점의 연장선에 놓인다. 그런데 멋진 들판의 사진은 그림처럼 다가온다. 노출 때문일까? 바람에 너울거리는 들판의 사진이 기가 막히다. 정갈한 나무 사진과 달리 나뭇잎들과 가지들이 많은 사진 속은 태양이 조명과 더불어 몽환적인 기분을 준다. 평상시 생각하던 선명함과 다르지만 색다른 기분을 많이 준다. 사진을 웹으로 검색하면 디지털화된 익숙한 상태로도 볼 수 있다. 

 

 작가는 웬만하면 어디를 기어 올라가는 습성이 있나 보다. 시선이 그렇다. 한옥 지붕에 소복이 쌓인 눈은 누구 집 지붕 위에서 찍었을까? 그런데 사람들은 거의 같은 눈높이에서 다가간다. 앞통수 건 뒤통수 건, 어른이나 어린이나 그렇다. 사람은 평등하기 때문일까? 

 

 사진들도 이름이 있다. 책에는 사진의 이름보다 사진 속에 담긴 이야기가 담겨있다. 낡은 철문 보다 반쪽짜리 하얀 벽돌이 더 인상적일 때도 있고, 수영하는데 어떻게 사진을 찍었을까? 하는 의문도 있다. 깊은 파란색이라 상상되는 하늘을 크게 담아 소품처럼 한 곳을 차지한 안테나, 도시를 담는 모습 풍성해서 좋다. 유화처럼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담은 사진도 인상적이고, 눈이 가득한 썰매장에 아이가 한 귀퉁이에 있어서 재미있다.

 

 대부분의 사진은 우리들 주변에 익숙하던 것들, 이젠 추억이 돼가며 새로운 것들에 자리를 내주는 것들에 대한 추억들이 많다. 우리도 하루를 살아가며 밥 먹을 때만 쓰는 용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바쁘다', '빨리빨리'라는 감탄사를 연발한다. 실제로 바쁘거나 급하면 숨쉬기도 바빠서 이런 감탄사가 나올 리 없다. 마음에도 숨을 크게 들이켜 공간을 넒히고 주변을 자세히 바라보며 세상의 숨겨진 발견을 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발견하지 못해도 어차피 흘러가는 시간이라면.. 

 

 기차역 한 칸을 차지하고 제임스 딘 느낌적 느낌이나 전혀 다른 포즈의 사진은 여러 번 봐도 참 재미있다. 

 

#김병훈 #가끔은_느린걸음 #느린걸음 #사진작가 #에세이 #독서 #khori                  

가끔은, 느린 걸음

김병훈 저
 진선북스 | 2022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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