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열대기후를 느끼는 날씨다. 휴가를 앞둔 더위는 고객들의 요구사항, 협력업체의 허술한 관리체계도 머리속에서 지우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간단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든다. 저녁에 듣게된 팀원 친척의 좋지 못한 소식과 주말에 다녀온 장례식에 이어 이번주의 시작인 월요일도 "대체 왜?"라는 넋두리를 부른다. 무엇을 해도 머리속이 맑지 않을 때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무작정 영화 한편을 예매했다. 앞으로 다가올 주에 야심차게 세운 계획은 군함도와 택시 운전사를 보고, Life사진전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다시 뜸했던 독서도 책상에 시위하듯 쌓아놓고 한 여름 더위에 맞서보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이런 야심찬 계획보다 종종 계획없이 잠시 일상을 즐기는 재미도 나쁘진 않다.
동료와 식사를 하고 극장으로 향했다. 예매한 표를 찾고도 45분 가량이 남았다. 가방속의 책을 뒤척이다 다시 넣고, 벽에 머리를 기대고 졸기 시작했다. 아무런 생각없이 앉은 곳이 기다란 대기 쇼파의 한 가운데다. "입장하세요"라는 환청을 듣고 깨어 서늘한 극장에 앉으니 한기도 돋는다.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이란 이름이 자자하다. 하지만 영화란 그 내용과 시각화된 영상으로 감독의 생각이 프레이밍된다. 시작부터 평범한 도시를 걷는 군인들의 모습이 한가로와 보일지경이다. 총성과 함께 유일한 생존자인 토미가 프랑스 진지로 총도 버린채 뛰어든다. 그리고 펼쳐친 거대한 파도와 해변가의 군인이 이제 막 새로운 장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린다.
대사가 많지 않다. 그렇다고 2차 세계대전을 그린 영화이지만 '라이언 일병구하기', '밴드 오브 브라더스' 처럼 화려한 전투를 통한 통쾌함이 없다. 그렇다고 '핵소고지'처럼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준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대신 생존에 대한 끊임없는 인간의 노력, 끊어지지 않는 인간애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토미와 깁슨은 말없이 이를 증명한다. 영국과 프랑스의 상황을 그 둘이 상징하고, 비록 헤어지지만 마지막 장면을 통해서 다시 함께 할 것이라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징병된 배를 대신 몰고 떠나는 선장 도슨은 묵묵히 덩케르크를 향한다. 군인들을 태우고 뒤로 돌아서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서 묵묵히 또 담대하게 행동하는 도슨은 역시나 많은 스토리를 안고 있다. 가장 인상적이고 영화를 보는 내내 그를 주목하게 된다. 자식을 전쟁이란 이름속에 묻고, 그리고 가슴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도슨이 있기 때문에 과도하게 이념적 대립구조속에 인간애와 사랑이란 이야기로 그려지는 한국전쟁의 영화보다 더 잔잔하지만 여러번 다시 생각해 보는 이유가 된다.
덩케르크보다 1.4후퇴의 한국전쟁 이야기가 더 많은 애환을 그릴수도 있다. 한국의 관점에서 기록한 이야기와 별도로 중공군의 관점에서 쓴 이야기를 같이 읽다보면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기에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유럽이 나치에 대해서 병적인 혐오와 충격을 갖은 공동체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하나의 문제에 여러 이웃이 함께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상황속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심리묘사를 토미를 통해서 보게 된다. 폭격을 통해서 침몰하는 구축함(destroyer)와 생존을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하나의 생명을 보며 문득 세월호가 겹친다. 전쟁을 떠나서 이 시대에 전쟁만큼 아픈 상처로 남았기 때문인가 보다. 아무생각없이 보기 시작한 영화가 더 많은 에너지를 쓰기 시작한 셈이다.
마지막으로 특별히 하는게 없어 보이지만 멋진 인물이 볼튼이다. 잔교 끝에서 망원경을 통해서 상황을 주시하고, 교신을 통한 임무와 목표를 흔들림없이 지키고 있다. 등장하고 별볼일 없어 보이는 그가 곧 극중에서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통해서 희망을 북돋는다. 작은 배들이 올것이라는 희망, 그 희망이 지켜지는 현장을 돌보며 마지막 한 명의 사병까지 승선시킨다. 그리고 첫 장면에서 토미를 지켜준 프랑스군의 참호처럼 다시 그들을 돕기 위해서 남는다. 멋진 역은 모두 볼튼에게 남는 것 같다.
이 영화에서 굉장히 시각적인 몰입을 주는 장면은 비행기 전투장면이다. 3대의 편대의 모습이 오래전 1945 전자오락에 나올법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조종사들의 대사와 서로를 돕는 모습은 상당히 감동적이다. 퇴각을 마무리하고 승리가 아님을 자책하는 모습과 위대한 수상 처칠의 그 이후를 대비하고 그 퇴각이 갖는 의미를 통해서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장면이 참 대비된다.
하루종일 복잡한 일들에 에너지를 퍼붇고 극장을 일어나다보니 다른 생각도 든다. 어려운 상황에서 모두를 구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올바른 신념보다 따뜻한 손길을 내어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영화속의 40만 모두는 아니지만 33만5천이라는 최대한을 끌어안는 부족함에 인간의 위대함과 숭고함이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