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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_인문_사회_정치 (冊)

나를 찾아 나를 만들어가는 길 - 나 홀로 읽는 도덕경 (feat 최진석)

by Khori(高麗) 2021.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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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진석 교수라는 사람을 통해서 참 많은 경험과 변화가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과 기억이 교차한다.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집에 돌아와서 "보이는 대로 보는 사람이 항상 이긴다"라는 EBS 노자 강의 중 한마디는 살아가는 길을 찾는 나에게 섬광처럼 지나가는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을 주었다.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어려서 읽었던 도올의 노자는 그 당시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삼분고전'에 자주 등장하는 도덕경의 구절이 갈수록 매력 있던 시절에 들은 저 한 마디 때문에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을 사서 읽는 계기가 되었다.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인간이 그리는 무늬', '탁월한 사유의 시선'까지 읽고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은 읽지도 못하고 책을 빼겼는지 선물했는지 그렇게 됐다. 지금도 책 표지에 큼지막하게 써진 싸인을 보면 불교대학 강의를 구경간 때가 기억난다. 통상적인 싸인에 비하면 파격이란 생각이 들었다. 노자를 볼수록 거대하고, 깊이 있고, 강력하다고 가끔 무섭다는 생각이 드는 것에 비하면... 

 

 

 그의 책이 왜 내게 호기심과 관심을 끌게 되었을까? 내가 살아오고 있는 X세대가 춘추전국시대와 같이 잦은 변화와 경험하지 못한 사건들이 많았기 때문일까? 한국전쟁을 경험한 어머니도 내 또래 세대가 목숨도 붙어있고, 풍성해졌는데 더 고단한 것 같다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 이런 위안과 위로의 말보다 내가 아는 것만으로 세상살이가 수훨치 않다는 것을 자각한 것, 그 자각의 절심함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한다. 애매한 말을 집합이란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이 시대를 살아내기 위해서는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의 실력과 생각하는 힘이 필요하다. 최진석 교수가 젊은이들에게 호락호락했던 시대가 없었다는 단언만큼 어는 시대나 실력과 생각하는 힘은 유효하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오~력'만 갖고 결과를 만들기 힘들다. 내가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가? 내가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어떻게 갈 것인가? 그런데 세상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가늠하기 힘들다. 전장의 한 복판에서는 적을 물리치기 바쁘지만, 전세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는 한 발 물러서서 봐야 한다. 물러서서 봤는데 보이는 게 없으면 역시 난감한 일이다. 우리가 발버둥 치다 그럭저럭 되는대로 살아가는 이유가 아닐까? 스스로를 찾아가는 길, 절실하게 노력한 만큼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읽은 "나 홀로 읽는 도덕경"은 저자의 책중에 가장 온화한 문체라는 생각을 한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은 타골 선생의 강력한 펀치가 느껴지기도 했는데 이 책은 강의만큼 자상하게 설명하는 느낌이 든다. 도덕경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질문과 화답이 현현하게 꼬이며 공자와 노자를 무대에 올려서 캐릭터의 특징을 잘 설명해주어 읽기 편하다. 만약 내가 처음 노자를 이런 책으로 접했다면 좀 더 빨리 잘 이해했을 것 같다. 단정적으로 갖고 있는 오해와 도덕경을 접하고 이해하는 관계적 사유체계를 쉽게 설명해 준다. 더불어 고전을 숭배할 것이 아니라 고전이 나를 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삶의 학습자세에 대한 말이 자신의 생각하는 힘을 길러가는데 아주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지식은 나에게 스며들어 도움을 주지만 결국 나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은 나이기 때문이며, 그런 지식을 융합해서 깨닫는 것은 나의 사유를 통해서 가능한 일이다. 노자를 통해서 내가 나답게 사는 법을 알아간다고 생각하게 된다.  

 

 인간 중심의 공자, 자연의 원칙중심 노자라고 하지만 나는 모두 인간을 지향하고 인간을 지향하는 방식을 인간 중심으로 볼 것인가? 세상 만물 속의 대원칙에 인간도 자유롭지 않다는 전제로 볼 것인가 그 차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고 나에겐 둘 다 필요할 때가 많다. 노자의 원리가 모든 일을 위한 해결책이 될 수 없고, 공자의 논리 또한 그렇다. 당연한 일인데 기분이 나쁜 일이 있고, 알 수 없는 일지만 기쁜 결과를 갖고 오는 모든 일을 하나로 정의할 수 있다면 세상은 아메바처럼 생각 없는 존재들로 가득 차지 않을까? 아메바도 살려고 부단히 노력한다고 보면 그 말도 옳은지 모르겠다.  

 

 논어를 처음 볼 땐 읽고 배우면 뭔가 좋아지겠지라는 생각이었다면, 노자는 여러 가지를 읽어가는 와중에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최진적 교수에게 질문했듯 나는 아직도 사유체계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공자와 노자는 보완전 관계가 되지 않을까라는 가능성을 갖고 산다. 노자가 앞서고, 공자가 따라오듯 이를 정과 반의 구조속에서 세상이 변화했다고 볼 수 있다. 서로 다름이 존재하는 것은 관계가 없다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어려서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이 시간이 흐르고 이해되는 것을 나는 좀 특별하게 생각한다. 그게 세월이 주는 교훈인지 세월 속에 변하는 나의 상황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모르던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긍정적이다. 

 

 배움이 있어야 어떤 경지에 다다른다. "모든 악의 근원은 무지하여 사유하지 않는 것"이란 최진석 교수의 말은 뼈아프다. 삶의 과정에서 반드시 이해하고 경계해야 하는 말로 다가온다. 배움의 깊이를 더해 그것에 고착되고 함몰되면 편협해진다. 이것은 아주 큰 부작용이다. 주화입마와 차이가 없다. 모방이란 학습과 관찰이란 학습 모두가 인간에게는 배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열린 사고가 필요하다. 한 분야에서 터득한 사유체계의 깊이를 배움의 여집합으로 확장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사유의 체계는 액션 드라마를 찍는 감독이 멜로드라마를 찍는 것과 같이 장르를 넓히기 것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비우고 보이는 대로 받아들여야 가능하다기 때문이다. 노자를 이해한다면 공자를 잘 이해함으로 깊이를 더하고, 공자를 잘 이해한다면 노자를 공부함으로 사유체계를 더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세상이 나빠지는 것은 아니다. 한 권 읽은 녀석은 죽기 살기로 달려들고, 백번 읽은 녀석은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하는 수준 차이는 결국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40개의 질문을 통해서 노자를 해석하고 시대를 관찰하는 철학자의 생각을 들어보는 방식은 원문을 읽고 해석을 듣는 것과는 다른 맛이다. 가장 인상 깊은 질문과 답은 "노자 사상에서 물은 어떤 특성을 갖습니까?"와 "노자에게 몸은 무엇을 의미합니까"였다. 

 

 그러나 원문을 들어가기 전의 마지막 문장이 훨씬 스스로에게 질문을 갖게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말이다. 내가 걸어온 길, 그 길 속에서 공부하고 사유하고 깨닫고 한 총체적인 것을 재료로 나는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 결과물이 나의 삶에 주렁주렁 달려서 끝까지 따라다닌다. 도덕경과 논어가 노자와 공자가 철학한 결과물인 것처럼 나는 무엇을 해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는 대단히 어렵다. 

 

 사실 심각한 문제이나 매일 이 문제가 떠오르지 않으니 이것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오늘같이 낮에 외식하고 낮잠 자고 지금은 라면 부스러기를 먹고 있는 나를 보면 이게 나답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고. 이렇게 삶이 축적되어 내가 되어간다. 살만 축적되기 전에 유무 상생과 같은 다양한 관계, 획일적인지 않은 유연한 사고, 공자의 따뜻한 인간애를 더해서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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