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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_예술 (冊)

내 마음의 어린 왕자가 별이 되도록 - 어린 왕자

by Khori(高麗) 2023.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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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서 KBS에서 저녁을 먹을 때쯤 매일 만화 영화로 보여줬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기억도 정확하지 않은  같다.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장미꽃과 이야기하던 어린 왕자의 기억만 어슴프레 남았다. 찾아보면 요즘 멋진 영상만 검색된다.  찾아보다 내가  만화가 82년 일본 만화 영화를 다시 한국에서 방영한  같다. 어려서 은하철도 999, 천년여왕, 하록선장, 코난 등 일본 만화가 많았으니까.

 

 초판본 어린 왕자 문고판을 받고 나서는  여러 추억이 떠오른다. 옛날 큰 누나가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와 "어린 왕자" 책을 사줬었다. 아는 형이 "갈매기의 꿈"도 선물로 줘서 놀기 바쁜 때에 간간히  기억이 있다. 가물가물한 기억에 하늘책 표지의 양장에 여백이 많은 교과서 크기의 어린 왕자 책이 떠올라서,  손에  들어가는 문고판 초판본이 새삼스럽다.  때나 지금이나 가녀린 어린 왕자보다 노란색 별이 선명하다. 그리고 옛날 기억이 가물가물한 어른이란 존재가 되어오고 있는 중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어려서  마음대로 하는 어른이 부럽기도 했다면, 어른이 되고  마음대로 되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  것이 가장 확실하게 배운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어른이 되고 무엇을 한다며 시간을 보내고 지내오지만 무엇이  지내고 있는 것인지 매일 알쏭달쏭하다. 인간이   없는 답이라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사람은 변덕 쟁이니까.

 

 매일 질문하고, 호기심을 갖고, 자신의 바라는 것이 명료한 아이들을 통해 즐거움을 느낀다. 어제도 머리 깎는데 이발사 아저씨의 어린 딸이 와서 빗자루질을 하겠다고 한다. 쪼꼬만 꼬마랑 눈이 마주쳐서 "몇 살이야?"라고 물어봤더니 빤히 쳐다보나 손가락을 4개 펼치며 "나는 여섯 살이요"라고 대답했다. 어찌나 귀엽던지 나도 환하게 웃어줬다. 엄마 손에 끌려가며 다신 손가락을 4개 펼치며 "나는 여섯 살"이라고 해서 나도 "그래, 안녕~"하고 대답을 해줬다. 가게에 남은 이발사,  그리고 가발을 벗은 아저씨 셋이서 이야기가 이어졌다. "딸이 키울만하지, 사내 녀석들은 저런 맛이 없어"라는 가발 벗은 아저씨의 말에 나도 동의를 했다. 이발사 아저씨는 "그렇죠 집에 가면 달려와서 맞아주고,  열어주고 마누라보다 낫죠"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하다 '우리도  때는 저런 대우를 받았었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왕자가 어디 멀리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계급 사회를 살지 알았지만 왕자보단 도련님이란 단어가 훨씬 좋다. 고모들이 어려서  잡아 땡기는 것만 제외하면. 그런데 어른이 되어가며 가장 크게 변하는 것은 무엇일까? 살아낸다는 이유로 학습과 교육이란 이름하에 고도화되는 것일까? 그런 고도화에 법과 제도에서 면책의 범위를  이해하는 것일까? 어떤 권력과 부라는 것을 위해서 이것을 제외한 많은 것을 방치하고 살아가는 것일까? 살아낸다는 것이 힘들어 포기하고 깊은 마음속의 동굴 바닥으로 침전하기도 하니까? 그게 중요한가?  중요한 것이 있는가?  가지 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어떤 것을 선택할지  생각해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세상과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가는지   있는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순수하고 천진난만하다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어른이 되면 가면과 같은 페르소나를 뒤 짚어 쓰고 산다. 서있는 무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대에 내려오면 가면을 벗고 일상의 모습을 지켜야 한다. 너무 오래  가면은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가면만큼 세상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기도 한다. 그런 사이에  가시가 네 개밖에 없던 장미가 시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양이 장미를 먹지 않았는데도 시들었다면 내가 마음속에 살고 있는 어린 왕자를 보살피지 못했다는 말이니까. 다음 주엔 누군가에게 손뼉을 쳐보라고 하고 인사하는 허풍쟁이처럼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어린왕자 #쌩떽쥐뻬리 #독서 #kh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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