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도 틀림없이 외워야 하는 시는 참 번잡스러운 것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차라리 낭독을 하는만 못하다고 생각한다. 몽규가 산문을 통해서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가깝게 다가온다. 내가 생각하고 표현하는 만큼을 그리듯 전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시란 글로 표현되지 못한 것이 읽는 자에게 상상력으로 돌아갈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더 깊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마음의 조각을 펼치기더할 나위없는 방식이다.
친구가 산문을 빼자 그의 생각을 말하는 동주의 의견도 그러하다. 시도 나의 생각을 전달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읽는 이의 상상력이 시인만큼 풍부하지 못해도 되지만 산문보다 이해하는데 더 높은 기대치가 존재한다. 식민지 시대의 말, 글, 민족의 혼(魂)을 말살당하고 제국주의를 대동아공영이란 포장속에 넣어 끊임없는 수탈과 약탈을 자행하던 시대에는 우리글로 된 시는 참 좋은 방법이다. 해석하는 만큼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영화 곳곳에서 낭독되는 시의 구절들을 듣자니 참 좋다. 아련한 추억처럼 보여지는 흑백영화라 더 좋다. 총천연색의 진짜 같은 가상의 2차원적 평면보다 수묵화의 농담과 같이 펼쳐지는 흑백영화는 눈과 마음에 더 진실하다.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어 더 좋다. 8mm 독립영화같은 느낌도 물씬 풍긴다.
난 배우 김인후를 볼 때마다 개그맨 김원효가 생각난다. 고국에서 작품활동을 하는 모습이 80여 년전의 이야기를 통해서 새삼스럽다. 그의 존재가 그렇다. 더 좋은 역할을 맡길 바란다.
그런 일본 형사와 윤동주, 송몽규는 대면을 한다. 문명화된 절차로 처벌을 하려는 일제를 동적인 몽규는 열등감으로 이야기한다. 통렬하다. 그는 그들의 비열함을 남기기 위해서 조서에 이름을 적는다. 정적인 동주는 시대를 살아가는 양심으로 서명을 거부한다. 가는 방식의 다르다고 가는 길이 다른 것은 아니다. 산의 정점을 밟는 길이 하나일 수 없다. 수 많은 길중 타인이 걸어간 길, 좀더 편안한 길을 택할 뿐이지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동주가 잡혀가기전에 받은 시집. 쿠미가 곱게 포장해서 전달하는 모습이 오래 여운이 남는다. 뺏어간 것을 돌려받는 느낌이다. 나도 조선어를 알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모습을 통해서 형식과 틀로 사람을 억죄는 것보다 사람과 사람으로 다가가는 힘이 훨씬 더 크고 위대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일본을 일본사람과 왜놈으로 구분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현상에 대한 반응이라고 조금 항변하는 셈이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이 품고 있는 사람을 사랑하던 청춘들은 시대를 마음에 품고 살아갔다. 그들이 더 긴 시간을 갖고 세상과 조우하지 못한 사연은 슬픈 일이다. 또 그런 청춘들의 마음이 모여 지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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