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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연 (劇)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내던진 세상 - 다음소희

by Khori(高麗) 2023.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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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직장 생활을 하는 내내 세상에 갖고 있는  생각이기도 하다. 10대의 어린 소녀가 세상을 비집고 나와 작은 터전을 마주한다. 항상 따뜻하게 대해주는 가족과 정겨운 친구들과 보내는 세상을 벗어나 세상을 나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30년 전에는 고등학교 졸업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상업계 고등학교, 공업계 고등학교를 마치고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은 특성화 고등학교라고 해야 하나? 60년 전이라면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을 줄어가고 대학교 입학 정원과 아이들의 숫자가 역전을 앞두는 시대다. 그렇게 소중한 아이들이 세상에 꿈은 고사하고 작은 터전을 잡는 일이  이렇게 힘들까? 아이들의 실력과 노력만 탓할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런 세상을 지금의 어른들이 만들었으니까.

 

 세상의 물질문명이 발전하고 고도화됐다. 고도화 세상의 발전을 위해 세상은 사람들에게  높은 수준을 요구한다. 사람은 태어나면 포맷된 듯 깨끗하게 태어나지만, 세상은 컴퓨터 하드 디스크처럼 시간을 축적하길 바라는 것일까? 본인들도 하지 못했던 것을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점이 발전과 성장이란 이름으로 요구되는 세상이 가끔은 이해도 되고, 필요도 하지만 정나미 떨어질 때가 있다. 소희가 춤을 추다, 구경하다 조금씩 멀어지는 듯한 모습이 마치 꿈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고도화의 모습도 있다. 지랄총량의 법칙은 이론화되지 않았을  누구나 공감한다. 어떤 일은 시작과 종결까지 과정이 있다. 모두들 성장, 이익, 발전, 혁신을 부르짖으며 부가가치 창출이  부분을 강조한다. 하지만 세상이 이것만으로 움직이진 않는다. 길을 청소하고, 기름을 넣어주고, 별거 아닌  같지만 배달을 해주고 하는 일이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다. 이런 일이 예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구조적인 체계가 되고 있다. 영화의 배경인  센터도 마찬가지다. 물건과 서비스를 팔고 사후관리는 하청업체에 시킨다. 원래 사업을 기획할  이런 비용들  고려된다. 거기서도  남기고, 귀찮은 것은 떠넘기는 것일 뿐이다. 예전엔  하던 일이니까. 

 

 이익을 좇고, 비용을 줄이면 문제가 나타날  해결이 아닌   문제가 된다. 무엇을 줄인 만큼 해결이 더디다. 해결이 더디면 귀책사유 같은 책임 문제가 불거진다. 동시에 그 속에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  속의 사람들이 몸으로 때우게 된다. 달리 3D업종이란 말이 수십 년 전부터 회자되었을까? 잘못된 절차, 위법한 일, 합법을 가장한 속임수가 계약이란 이름으로 포장된다.  이유는 사람을 못살게 구는 것이 아니라 이익을 취하기 위해 사람들이 어려워지는 것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문명은 사람을 위한 것인데, 그것을 만들며 생존해 가는 사람들 중엔 그림자처럼 사라지는 부분이 있다. 세상이 마치 거대한 에밀레종처럼 사람을 집어삼키고,  에밀레 종의 소리를 즐기는 사람이 있는 아이러니다. 이런 일을 마주하면 사회적 약자는 버겁다. 법과 계약만 들이대도 힘들고, 생존을 터전을 지키기 위해 염치는 개나 줘버리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슬픈 마음을 홀로 품고 폭발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세상의 구조적 문제에 관심이 적고 모두 이익을 좇으면 세상은 디스토피아를 면하기 힘들다. 살만한 세상은 못 만들어도 여기를 지옥으로 만들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경감 배두나가 일을 쫒으며 듣게 되는 이해관계자와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른들의 염치없는 비겁함을   있다. 핑계와 책임전가에 바쁘다. 어쩌면 그런 어른들도  구조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지위에서 본인과  사람의 생존을 위해서 어쩔  없다는 변명을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의 첫발을 떼는 아이들에게 이런 가혹한 환경을 누가 만들었는가?  아이들이  이웃과 가족의 아이들이기도 하다. 그들이 자신들의 자식이라며 그렇게 할까? 최소한 지금보단 조금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존한 아이들은 어떤 세상을 만들어갈까? 후세대는 앞세대의 뒤통수를 보고 배울 수밖에 없다. 어떻게 배웠을까? 그것이 걱정스러운 시대다. 

 

 어떤 면에서 기성세대, 노후세대가 먹고살자고 구조적으로 후세대를 갉아먹는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세상은  번에 변하지 않는다. 지금 이렇게 변화된 세상이 살만한 구조인지를 돌아보고  조금씩 변화를 해야 한다. 이러다 아이들이 크면 언제가 영화제목처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말이 그냥 농담이 아닐까 걱정이 된다.

 

 주변을 보면 요즘 신입은 없지, 조금 배우면 바로 퇴사하지, 개발인력은 뽑는  포기한 상태야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길거리의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사람 구하기도 힘들다는 말은 어쩌면 참 아이러니하다. 동시에 아이들이 세상에 진출하기 쉽지 않다는 뉴스는 끊임없다. 세상에 아이들이 줄고는 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항상 어떤 목적을 위해 필요한 사람이 될 것을 강요하지, 아이들이 품은 질문과 의견을 경청해 주지 못한  아닐까? 최소한 세상의 생존을 위한 터전을 만들어 주지 못하는 세상에 미래가 있을까? 그런 세상에서 자식이 살아가고 자식의 친구들이 살아간다면 이걸 고도화와 발전이란 이름으로 동의할 일인가? 사람이 살만한 세상은 아니더라도 사람이   있는 세상은 되어야 할 텐데. 그런 지적이 아픈 영화의 현실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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